하얀 바다
노르웨이 비평가 문학상 및 서점상, 북유럽협의회 문학상
수상 작가 로이 야콥센의 대표 연작 〈바뢰이 연대기〉
그 장엄한 여정의 두 번째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세상, 노르웨이 북부 해안 어딘가. 본토에서 청어를 손질하며 살아가던 잉그리드는 이제 서른다섯 살이 되었고, 더 이상 그녀에게서 소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어느 날, 그녀는 고향인 바뢰이섬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주인 없는 나룻배에 몸을 실은 채 노를 저어 섬으로 향한 그녀는, 돌아온 고향에 생명의 흔적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할아버지 마틴과 아버지 한스, 어머니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후, 남아 있던 가족들마저도 모두 섬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다. 고모 바브로는 병원에 입원해 있고, 그녀의 아들 라스는 로포텐에 정착해 가정을 꾸렸으며, 딸이나 다름없었던 수잔은 열네 살도 되기 전에 섬을 떠났다. 그녀의 오빠 펠릭스도 섬을 잊은 듯하다. 잉그리드는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 방을 둘러보고 램프에 불을 밝힌 뒤, 부엌과 거실에 불을 지핀다. 이제 이 섬을 다시 생명이 꿈틀거리는 삶의 터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잉그리드 한 사람뿐이다.
그녀는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 사이에 서서 집과 외양간, 해안의 부두와 정고를 응시했다. 갑자기 그녀를 이 섬에 붙들어 두었던 그 모든 것들이 엄밀히 따지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있으면 눈은 비로 바뀔 것이고, 섬은 진드기처럼 갈색으로 변할 것이며,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바다는 잿빛으로 변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섬에 산다는 것은 항상 무언가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그리드는 쌓인 눈 밑에서 옷가지들을 발견한다. 갈색 누더기 같은 옷을 집어 들자 톱밥이 떨어져 나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옷이다. 이어서 그녀는 바다에 펼쳐져 있는 그물을 끌어당기다 부패한 시신을 발견하고, 축사에서도 남자 시신 한 구를 더 찾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다. 잉그리드는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할 수 있게 간호하면서, 섬을 돌아다니며 썩은 옷가지를 찾아 태우고 발견되는 시신들을 한데 모아 두는 등 강인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밀려오는 외로움만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내내 그에게 노 젓는 일을 맡겼다. 그가 노를 젓는 동안만큼은 그에게 들키지 않고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을 봐 버린 그는 노를 내려놓았다. 그가 양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녀는 그의 엄지장갑에 얼굴을 기대면서도 그를 돌아보진 않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룻배는 파도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그가 다시 노를 저었다. - 본문 중에서
잉그리드와 남자는 서로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점차 각별한 감정을 나누게 된다. 그럴수록 그녀의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이 남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독일인이 아니라면, 러시아인?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녀의 외로운 삶에 기쁨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잉그리드는 고양이를 데리고 올 겸, 장을 보기 위해 본토에 갔다가 영국 전투기가 독일군 수송선을 폭파해서 수백,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섬에서 발견한 옷가지와 시신에 대해 반드시 본토의 독일군에게 보고해야만 한다. 만일 그들이 섬을 조사하러 온다면, 분명 이 낯선 남자의 존재를 의심할 게 분명하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는 바뢰이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잉그리드는 섬의 주인으로서 바뢰이섬을 지키고, 사랑하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는데…….
1954년 12월 26일 노르웨이 오슬로 출생. 1982년 첫 단편 《감옥생활(Fangeliv)》을 발표했고, 노르웨이 작가연합이 그해 최고의 데뷔작에 수여하는 타리에이 베소스 데뷔상(Tarjei Vesaas’ debutantpris)을 수상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90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노르웨이 비평가 문학상(Norwegian Critics Prize for Literature)을 수상했다.
1991년 《승리자들(Seierherrene)》과 2003년 《서리(Frost)》로 북유럽협의회 문학상(Nordic Council’s Literary Award)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안았다. 《꺼져 버린 기적의 도시(The Burnt-Out Town of Miracles)》는 2009년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International Dublin Literary Award)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16년에 발표한 《보이지 않는 것들(The Unseen)》은 노르웨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2017년 맨부커 국제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과 2018년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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