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전ㆍ범이 꾸짖다ㆍ요술 구경
오늘의 한국어로 새로이 다듬어 쓴 박지원의 걸작 「양반전」 「범이 꾸짖다」(원작명: 호질[虎叱]), 「요술 구경」(원작명: 환희기[幻戱記]) 이상 세 편이 실려 있다.
「양반전」과 「범이 꾸짖다」는 그동안 많은 판본이 나왔지만 따로 상황 설명이 필요한 장면, 특수한 어휘가 개입한 표현, 어려운 전고가 나오는 문장은 슬쩍 빼놓은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글의 앞뒤가 끊어지게 되면 요설의 효과와 점층-점강의 짜임을 면밀하게 계산하면서 쓴 박지원 글의 참모습은 살아날 수가 없다.
두 글은 민담이 아니라 개인의 창작이며 완결된 한 편의 문학 작품이다. 어쩔 수 없이 원작에 손을 대더라도 작품의 구조, 세부의 흐름, 창작하며 노린 수사의 효과 들을 염두에 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 실린 「양반전」과 「범이 꾸짖다」는 전고를 이용한 고전적인 수사 하나하나에서부터 특수한 어휘가 슬며시 전하는 속뜻까지, 어린 독자가 충분히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도록 원래 뜻에 맞게 풀어냈다. 함부로 생략된 다른 판본에 비해 양반 문서의 양이 많고, 범의 꾸지람이 긴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문호이자 실학자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그밖에 공작관·무릉도인武陵道人·박유관주인薄遊館主人·성해星海·좌소산인左蘇山人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당시 중국의 정세를 살피고, 그 선진 문명을 소개하는 한편, 조선에 대한 심도 있는 내부 비판을 시도하였다. 1786년 음직으로 처음 선공감 감역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이후 여러 말단 벼슬을 거쳐 1792년 안의 현감에 임명되었고, 1797년 면천 군수가 되었다. 1800년 양양 부사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홍대용과 함께 조선의 주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 위에서 이용후생의 실학을 모색했으며, 창조적이고 성찰적인 글쓰기를 통해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갖고 있던 미망과 편견, 허위의식과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와 미의식의 지평을 몸소 열어 나갔다. 문집으로 『연암집』이 전한다.
박지원은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자, 문체반정의 핵심에 자리하게 된 『열하일기』를 통해 불후의 문장가로 조선의 역사에 남은 인물이다.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라는 코스에서 벗어나 이덕무, 홍대용, 이서구, 백동수 등과 어울려 수학하였다. 1780년에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열하일기』라는 저서를 남겼다. 그는 69세에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운명을 달리했다.
양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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